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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산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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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산향교
      지 정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257호 (1992.7.18)
      위 치 김천시 김산향교1길 2-19
      내 용 창건 연대는 고증할 길이 없으나 1127년 (고려 인종 5년)의 조서(왕의 뜻을 알리기 위하여 적은 글)와 1392년 (태조 1년)의 명으로 부, 목, 군, 현에 1교씩을 설립토록하고 향교 의 흥폐로서 지방 관원의 고과에 1교씩을 설립토록하고 향교의 흥폐로서 지방 관원의 고과를 삼도록 하였는데 김산향교는 그 어느때의 창건인지 알 수 없다.
    • 다만,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34년(인조12년)에 김천시 조마면 강곡리 출신 진사 강설이 사재를 희사하고 유림의 도움을 얻어 대성전과 명륜당을 재건하고 나머지는 완성을 못한 채 세상을 떠나자 아들 여구가 어른의 유지 를 받들어 널리 모금하여 동서재. 동서무. 묘문를 복원하여 향교를 재건하였다.

      그 당시 중건 상량문을 창석 이준이 썼다.
      김산향교는 중설의 향교로서 종래에는 공자를 주향으로 하고 배향으로 4성 안자, 증자, 자사, 맹자와 10철 즉 민손, 재웅, 단목사, 중유, 복상, 재경, 재예, 재구, 언언, 전손사와 6 현 즉 주돈이, 정이, 장재, 정호, 소옹, 주희와 동방 18현 곧 신라2현 설총,최치원 고려.조선시대16현 안향 ,정몽주,김굉필,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김집, 송준길, 정여창, 이언 적, 김인후, 성혼, 조헌, 송시열, 박세채를 제향해 왔다가 1949년 부터는 공자를 비롯한 4성과 2현등 중국의 7위와 우리나라 유현 18위만을 제사하고 중국의 14현을 매주하였다.
      그후 제향만은 유지되어 왔으나 향교 재산의 대부분은 학교조합에 이관되고 광복후에는 성균관대학교 설립에도 수십 두락의 전답을 희사하고 또 경상북도 유림회에 사업기금으로 수십 두락의 전답을 희사한 나머지 7-8두락은 토지개혁으로 없어지고 말았다. 그 후 망실 되었던 밭 3두락이 있으나 고자가 무상 경작하고 있다.

      6.25동란으로 향교 비품과 문서는 분실되고 퇴락한 것을 1973년 현경길이 전교로 취임하여 6년에 결쳐서 일대 중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생 강학은 중설로서 50명을 수용하여 훈도가 교육을 담당하고 유생은 반드시 동서재에서 기숙하고 매일 조석으로 의관을 갖추고 식당에서 회식하며, 도기에 출석 표시를 하여 300일 이상을 숙식해야만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과거 시험은 매우 까다로와 보통 수년에 걸쳐 소과에 응시하게 되며 응시하더라도 좀처럼 합격이 어려웠다. 향교의 개관에서 밝힌 바 있지만 소과에 합격되면 생원, 진사의 호칭을 얻고 성균관에 입학 자격이 주어진다.

      사대부의 자제는 대개 7.8세 이전에 거의 마을마다 있는 서당에서 한문의 초보와 습자를 배우고, 15-16세 이전에 향교에 입학하여 수년에 걸친 수업을 마치고 소과에 응시하였다.
      향교가 융성하던 조선 중기 까지는 향교의 규율이 엄격하고 올바른 교육을 할 수 있었으나 중기 이후는 학풍이 문란해져 향교에 자제를 보내기를 꺼리게 되고 서원을 찾게 되었다.
      1718년에 여이명이 쓴 필사본 금릉지에 김산향교의 문란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내가 어렸을 때 향교에 출입하면서 어른들의 인사하고 사양하는 예절을 보고 과연 인륜이 밝음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조심하는 마음이 생겨 비록 몽매한 나로서도 향교문을 들어 설 때 의용을 바로하고 앞뒤를 가려 태만한 생각을 못했는데 요즘 와서는 의론이 각각 달라 자기편 당의 그릇된 일도 엄호함은 동재뿐 아니라 서재도 마찬가지다.
      전에는 동서재에 유생들이 5.6십명에 불과했는데 지금 와서는 백여명이 넘고 향사일과 문회때에는 고성으로 떠들어대고 아무렇게나 앉아서 농지거리나 하며, 젊은 사람이 나이많은 사 람을 이기고 천한 사람이 귀인을 능멸하는 등 망칙한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식자들 간에는 한심한 일로 여겨온지 오래이다. 그간 폐단을 바로 잡으려는 사람이 한 둘 없었던 것은 아니나, 한두 손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한탄할 노릇이다.
      교임을 택함에 있어서도 문필이 있는 사람을 골랐는데 그때에 와서는 배우지 못한 자들이 뽑혀 향교 문서에도 글귀가 맞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뒹굴어 자고 하여 수치스러움이 이만 저 만이 아니다.......]

      18세기에 들어면서 향교의 풍기가 문란해져 가는 모습이 여실하다.
      일제 강점시대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된 채 향사만을 행하여 오다가 1985년 부터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계 충효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김산향교의 관할은 구, 금릉군 봉산면, 대항면, 조마면, 감천면, 어모면, 감문면의 구, 위량면(은림, 구야, 금라, 남곡, 도명, 문무, 적하, 성북, 송문)으로 1924년 이전의 김산군 일원 이었다.
  • 봉황대
    • 봉황대
    • 봉황대
      지정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15호 (1985.8.5)
      위 치 김천시 금산동(교동) 820-1 연화지
      연 대 1700년대 이전
      규 모 사방 3간, 2층 누각, 팔작지붕, 면적 35.64㎡
      내 용 처음에는 삼락동 마을 북쪽에 있었다.연대는 미상이나 창건시는 읍취헌이라 했는데 김산 군수 윤택이 봉황루라 이름을 바꾸었다. 김항주 군수가 1771년에 중수하면서 봉황 대라는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1792년에 이성순군수가 개수하고 1838년에 군수 이능연이 연화지 못 가운데로 옮겼다.
      1896년에 윤헌섭군수가 성금을 모아 중수하고 1978년에는 김천시에서 시비 7백만원으로 개수했다.
    • 전설에 윤택 군수가 하루는 봉황이 날으는 꿈을 꾸고 길조라 하여 봉황루로 고쳤다고 한다.
      이 고장을 "삼산이수"라 하였는데 지금은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못 가운데 묏봉우리 셋을 쌓아 만들어 삼산이라 하면서 선비들이 다락에 올라 술잔을 기울이면서 물에 비치는 산그림자 를 바라보노라면 절로 시흥이 일어 풍류를 즐기던 곳이라 하여 이태백의 시 "봉황대에 올라"에서 따온 이름일 것으로 생각된다.
      봉황대를 시제로 한 옛 시인들의 시가 향지에 많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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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 2014-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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